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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들에게 길을 묻다] 새로운 왕조국가 신라의 탄생...`신라에 유입된 선진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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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 명예교수 주보돈 작성일20-11-24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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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대 명예교수 주보돈[경북신문=경북대 명예교수 주보돈] 경북신문이 주최한 '2020 신라왕들의 축제'에서 열린 학술대회 '포스트코로나시대 신라왕들에게 길을 묻다'에 참가한 학자들의 발표문을 연재한다. 신라왕들과 신라인의 창조적인 글로벌 의식과 혜안을 통해 코로나19 이후의 새롭게 전개될 세계를 적응하는 지혜를 얻기를 기대한다.
 
  2. 한계와 도전
 
  두루 아는 바처럼 신라는 경주분지를 주된 근거지로 삼은 읍락국가(邑落國家)로서 진한 연맹체의 맹주 역할을 담당한 사로국(斯盧國)을 모태로 해서 출범한 왕조국가였다. 4세기에 진한 연맹체 내부에서 사로국 주축으로 정치적 통합 운동이 진행된 결과 최종 승리를 거둠으로써 신라라는 새로운 왕조국가가 탄생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처럼 사로국이 통합 운동에서 승자가 된 비결의 하나는 흔히 진한 사회 내부에서 차지하는 지리적 이점(利點)에 있는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경주분지는 여러 갈래의 육상 교통로가 모여드는 하나의 결절지(結節地)이면서 동시에 바다로부터 내륙으로 들어갈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일종의 관문지(關門地)로서 기능할 만한 매우 유리한 여건을 갖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산악으로 둘러싸여 바깥 세계와 거의 격리되다시피 한 형세의 영남권에서 북쪽에서 발원해 남쪽으로 중앙부를 관류하는 낙동강 수로로부터 약간 벗어난 권역에서 가장 유력한 세력으로 부상해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지리적 이점은 신라가 건국된 이후에도 그대로 유리한 요소로서 계속 기능한 것이 아니었다. 낙랑과 대방이 고구려에 복속되던 4세기 초 이전까지 북방에서 발생한 유이민이 끊임없이 남하하는 환경에서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막다른 골목에 입지한 사로국은 그들을 매개로 받아들인 선진문물이 성장과 발전에 대단히 유리한 동인(動因)으로 작용하였음은 분명하다.
 
  그것이 사로국으로 하여금 진한 사회를 주도하게 하는 데에 주요한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신라가 출범한 마당에 기존 지리적 위치는 유리한 요소로서 이어진 것이 아니었다. 신라국가가 출현하면서 사로국 자체는 그 왕경으로 전환되고 복속 지역들은 지방으로 편제되는 등 제반 사정은 확연히 바뀌었다.
 
  이처럼 삼국(정치적 분립된 상태의 가야도 포함)이 정립됨으로써 한반도 동남방에 치우친 지리적 여건은 이제 신라로 하여금 선진지역과의 접촉을 매우 불리하도록 만든 요인으로 달라졌다. 바깥에 경쟁 세력인 고구려나 백제와 같은 큰 정치적 장벽이 생겨남으로써 새로운 문물과 유이민의 유입은 저절로 막히고 말았다.
 
  신라는 선진지역과 직접 접촉해서 새로운 문물을 입수하기 곤란한 상황에 직면하였다. 그를 추진해 나가려면 주변의 강한 세력에 의존하는 등 수동적·소극적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 사정의 일단을 잘 반영해주는 것이 이른바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란 무덤과 거기에 담긴 제반 문화 양상이다.
 
  4세기 중엽 이후 6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경주분지의 중앙부에 조영된 고총(高塚)인 적석목곽분 속에는 피장자의 정치사회적 위상뿐만 아니라 당시 소유한 재부(財富)의 정도를 가늠케 하는 각종 수많은 물품들이 부장되었다. 그 가운데 금은과 청동제의 다양한 세공품과 장신구류, 철제의 무기·무구류(武具類) 및 마구류(馬具類) 등 각종 위세품류(威勢品類)는 각별히 주목해볼 대상이다.
 
  이들은 대체로 4세기 이전까지 경주분지 일대는 물론 한반도 중남부 지역의 삼한 사회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새로운 물품들이다. 이미 존재한 것이더라도 서로 견주기 어려울 정도로 질적 수준에서 두드러진 격차를 보인다. 이들은 대체로 달라진 국제환경 아래에서 선진지역으로부터 신라의 중앙부로 새로이 유입된 문화와 문물들인 셈이다.
 
  거꾸로 적석목곽분 조영의 시기에는 국제환경이나 교역체계 전반이 직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면모를 뚜렷이 입증해주는 물증들이라 하겠다. 물론 적석목곽분이란 새로운 성격의 묘제 자체가 그런 양상 전반을 상징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신라 왕경에서 처음 모습을 보인 외래 계통의 새로운 물품들은 자체에서 제작된 것이 아니며, 거의 대부분 바깥 세계로부터 들여온 것이다. 당시의 정황상으로 미루어볼 때 제작지에서 직접 들여온 것도 없지 않을 터이나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였을 듯하다.
 
  당시 형편상 대체로 고구려의 것이거나 아니면 그를 중간 매개 고리로 해서 바깥으로부터 들여온 외래품이 주류였을 것 같다. 이들 가운데 신라 왕경으로부터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곳인 중앙아시아나 로마제국 영역에서 제작된 것까지 포함됨은 특별히 주목된다.
 
  각종 물품들의 원제작지나 계통에 대한 세부적 사항의 분석은 낱낱이 이루어져야 마땅하겠지만 당시 신라의 주변 사정이나 상황으로 미루어 현지나, 현지인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에 의거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겠다.
 
  여러 갈래의 중간 통로와 중계지(中繼地)를 거친 소산물로 보인다. 당시의 지리적 형편상 인근의 신진국인 고구려나 백제와 같은 곳을 경유하지 않고 신라로 곧장 들어왔다고 보기는 힘든 국면이었다.
 
  그처럼 새로운 문물에 대한 간접적인 수용은 신라를 둘러싼 환경 때문에 부득이하였다.
 
  선진지역과의 직접적인 교섭과 접촉의 산물로 보기에는 겪어야 할 위험이 너무나 컸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경비 부담이 뒤따랐을 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부의 자체 제작이 있을지 모르나 외래 계통 물품의 대부분은 여러 곳의 중계를 거침으로써 비로소 경주분지에 다다른 것이라 봄이 온당한 이해일 듯 싶다.
 
  그런데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는 불편함이나 불리함이 얼마 뒤에는 오히려 신라를 크게 탈바꿈시키는 주된 동인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신라는 바깥 선진의 세계와 새로운 문물을 동경하면서 직접 접촉하기 힘든 불리함과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를 지속적으로 추진함으로써 마침내 뜻을 이루게 되었기 때문이다. 
 
  불리한 국면은 신라인들로 하여금 현실에 만족하고 안주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를 극복하도록 추동하는 동인으로 작동하였다. 불리할수록 그만큼 선진지역과 문물을 직접 접촉하는 꿈을 더욱 키워준 셈이었다.
 
  지리적인 불리함은 오히려 신라인들로 하여금 한계에 도전해서 개척하며 모험하는 정신을 기르도록 한 배경으로 작용한 것이라 하겠다. 신라(인)는 언젠가 그런 꿈과 희구가 구현되리란 기대를 갖고 꾸준히 예비해 나갔다. 
 
  사실 선진지역으로 직접 나아가려는 꿈과 희망을 실현시키려면 먼저 현실의 환경을 바꾸어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내부적으로 힘을 기르고 꾸준히 쌓아나가는 것밖에 달리 길이 없었다.
 
  하루아침에 목표 지점에 도달하기는 어려웠으므로 상당한 준비 기간이 필요한 것이었다. 적석목곽분을 조영한 마립간(麻立干) 시기, 이른바 부체제(部體制) 단계는 바로 그를 이루어내기 위한 과도기적인 시기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계속>
경북대 명예교수 주보돈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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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출처 : 경북신문 (www.kbs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