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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미 생활칼럼] 트랙터에 블랙박스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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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김영미 작성일20-12-03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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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가 김영미길에서 농민 김 씨를 만났다. 가을걷이에 힘이 들었는지 어깨가 구부정한 모습이다. 인사를 나누자마자 대뜸 부동산에 땅을 내놓으러 가는 길이라며 묻지도 않는 말을 꺼낸다. 어지간히 화가 났던지 아직도 분을 삼키지 못한다. 지금부터는 김 씨가 들려준 이야기다.
 
  올 가을에는 두 번이나 강력한 태풍을 겪었다. 지붕이 날아가고 하우스가 주저앉는 위력에도 다행이라면 다행인지 벼는 쓰러지지 않고 견뎠다. 도복되지 않았으니 평년작은 되리라 기대를 했었는데 막상 콤바인을 대어보니 한숨이 나왔다. 흉년도 이만저만한 흉년이 아니었다.
 
  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밭에 심은 것들은 종자조차 거두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농부가 아무리 부지런해도 하늘이 보살피는 만은 못하다. 인간이 파괴한 질서에 뿔이 난 하늘이 내는 화풀이를 농부가 고스란히 당하는 것만 같다.
 
  벼농사를 업으로 삼는 농민 대부분은 남의 논을 세내어 짓는다. 흉년이어도 세는 주어야하고 주고 나니 쭉정이만 남았다. 도시에 집주인은 세를 깎아도 준다는데 논주인들은 한결같이 모르쇠다. 작년에 이어 연거푸 입은 재해에 김씨는 농사를 접을까말까 흔들렸다. 이런 판에 화를 돋우는 일은 다른데 있었다.
 
  들을 낀 산 중턱은 대부분 인가가 있다. 특히 경치 좋고 공기 좋은 곳은 귀촌인이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농사보다는 펜션이나 카페 같은 영업을 주로 한다. 사람 사는 곳에 사람이 모이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도로였다. 펜션에 드나드는 차가 쓰는 길은 마을 안길이거나 농로다. 농로란 농사를 짓기 위해 생긴 길이다. 시멘트포장이 되었다하나 차 한 대가 지나다닐 정도의 넓이다. 특히 손님이 몰리는 나들이 철은 농번기와 겹친다.
 
  농기계는 대형이라 갓길에 승용차 한 대만 주차되어도 움직일 수가 없는 사태가 발생한다. 가을 들어 추수가 시작되자 마찰이 빚어졌다. 벼를 베는 데는 콤바인이 필요하다. 콤바인은 트랙터에 매달린 트레인에 실려 이동한다. 콤바인이 논에서 추수를 할 동안 트랙터와 트레인은 주차를 하고 기다린다. 알곡을 실어야하는 트럭까지 필수다. 따로 주차공간이 없으니 잠시 길을 막을 도리밖에 없다. 
 
  김 씨가 논에 들어 일을 마쳐갈 즈음이었다. 펜션에서 나온 손님이 길을 비켜 달랬다. 빤히 보이는 다른 길이 있는데 굳이 턱밑에까지 바짝 다가와 클랙슨을 눌러대었다. 사실 바둑판같이 정리된 들에서 일부 구간이 막힌다하여 완전히 막히는 것은 아니다. 조금 돌아야 해서 불편할 뿐이다.
 
  그런데 이 손님들은 원리원칙을 내세우며 소리를 질렀다. 화를 내어도 못들은 척 했다. 그런데 타작을 마친 김 씨는 황당했다. 꽂아둔 열쇠가 감쪽같이 사라져서다. 아무리 찾아도 열쇠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 사는 누군지도 모를 뿐 아니라 안다고 해도 딱히 그들이 한 짓이라는 증거도 없었다. 혹시나 싶어 바퀴 밑이나 길가 풀숲을 뒤지다 할수없이 벼가 실린 트럭을 몰고 집으로 가 예비열쇠를 가져가서야 트랙터를 이동할 수 있었다.
 
  수억원의 기계를 논에 그냥 두기도 했지만 길을 막았으니 마음이 급하기만 했다. 짐을 내릴 사이도 없이 열쇠를 찾아 쥐고는 들로 나가다 마을 안길에서는 마주오던 차와 부딛칠뻔한 아찔한 순간까지 겪었다. 왔다갔다 헛짓을 하는 사이 짧은 가을 해는 서산으로 줄행랑을 쳐버렸다.
 
  더 화가 나는 것은 자식 또래의 젊은이란 것이었다. 도시화에 익숙한 젊은이들이 촌사람들의 사정을 헤아리기는 어려울 것이라 이해를 하면서도 분이 나더란다. "나도 자식 키우는데 내 자식도 눈만 벗어나면 같겠거니 여기며 참긴 하는데" 하며 말을 맺는다. 
 
  농민이라 하여 무턱대고 길을 막아서도 안 되지만 잠시 다녀가는 사람들도 배려하는 마음이 아쉽다. 많은 김씨가 농사를 접는다면 풍경은 사라질 것이다. 일부러 시간과 돈을 들여 구경 온 그곳에  공장이나 집들이 빽빽이 들어찬다면 어떨까?
 
  농부는 하늘을 닮는다 한다. 하늘과 같이 씨 뿌리고 가꾸어 걷어 들이며 닮아가는 것이다. 이런 삶의 방식이 존중받지 못 하는 것이 꼭 농민의 잘못 때문인지 묻고싶다. 쌀가마를 앞에 두고 김 씨는 농사를 치워야하나 도시로 이사를 갈거나 고민을 많이 했단다.
 
  농부가 땅 없이 살기는 어렵다. 누군가 달래줄 사람이 필요한 게다. "트랙터에 블랙박스를 다세요. 회장님이 타는 승용차만큼이나 비싼 트랙터인데 왜 못 달겠나? 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누군지 밝혀서 혼구녕을 내주자"며 마음을 쓰다듬었다. 김 씨가 진짜로 블랙박스를 달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입 안이 쓰다.
수필가 김영미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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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출처 : 경북신문 (www.kbs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