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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들에게 길을 묻다)] 서국식 화장·동해 대왕암 무덤 조영… 새로운 시대 열고자했던 문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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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 명예교수 주보돈 작성일20-12-03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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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대 명예교수 주보돈[경북신문=경북대 명예교수 주보돈] 경북신문이 주최한 '2020 신라왕들의 축제'에서 열린 학술대회 '포스트코로나시대 신라왕들에게 길을 묻다'에 참가한 학자들의 발표문을 연재한다. 신라왕들과 신라인의 창조적인 글로벌 의식과 혜안을 통해 코로나19 이후의 새롭게 전개될 세계를 적응하는 지혜를 얻기를 기대한다. 
  4. 통일 이후의 과제(2)

  사실 앞으로 추진해 나가지 않으면 새로운 제반 정책에는 엄청난 반발이 뒤따를 것임을 예상한 데서 마련한 결단이었다. 신문왕으로 하여금 자신의 생각을 몸소 실행함으로서 대책을 철저히 강구하고 과감하게 추진하도록 한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문무왕의 시책은 신라국가를 새롭게 획기적으로 바꾸려는 의도를 밑바탕에 깔고 있었다고 하겠다. 아마도 문무왕이 신문왕으로 하여금 구전에서 즉위하도록 지시한 것도 화장에 대한 반대 명분을 내세워 일체의 새로운 시책에 전통 보수적 지배귀족들이 강하게 반발할 것임을 예상한 데서 나온 대비책으로 여겨진다. 

  화장과 함께 뼈를 매장하지 않고 멀리 떨어진 동해안에다 뿌린 사실도 크게 주목해볼 만한 대상이다. 그동안 왕릉은 모두 경주분지의 중앙부 일원에 조영해 봉분을 크게 갖춘 형태의 매장이 일반적이었다. 화장을 실시한 점에서도 그러하지만 무덤 자체를 동해안에다 마련한 것은 대단히 획기적인 조치였다.

  6세기 초부터 직전까지의 집단성을 벗어나 왕릉은 개별적인 경향성을 보이면서 대체로 왕경의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조영하였다. 그런 실상에 비추어 보면 화장한 자체도 그러려니와 동해안에다 묻은 것도 대단한 파격이라 할 수 있다. 기존 체제나 운영에 대한 어떤 근본적인 변화를 강력하게 내비치려는 의도였다.   

  문무왕은 생존 시 고문외정(庫門外庭)에서 화장하도록 한 뒤 이를 동해안의 큰 돌 위(大石上), 이른바 대왕암(大王岩)에다 장사지내도록 유언하였다. 이 자체는 문무왕의 치밀성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거니와 어떤 기획 아래 계획적으로 추진하였음을 뜻한다.

  물론 동해안에 장사지낸 것은 두루 아는 바처럼 감은사의 창건과 어우러지게 바다를 통해 들어오는 왜(倭)의 공격을 불력으로 물리치려는 염원에서 비롯한 것이지만 이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시대를 열려는 강력한 실천 의지를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문무왕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전쟁 이후 이제 동아시아 세계는 당 주축의 신질서 아래에 움직여질 게 뻔히 드러난 상태가 되었다. 이제 신라도 마냥 기존 세계관과 체제에 집착할 상황이 아니었다.

  문무왕도 앞서 대세처럼 좁은 신라 중심의 세계관을 하루빨리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전향적 생각을 갖고 있었다. 거기에는 문무왕이 즉위 전 당나라에 가서 선진의 문물을 직접 접촉하고 목도한 사실이나 당과의 연합작전을 통해 얻은 경험이 적지 않게 작용하였을 것 같다.

  문무왕 법민(法敏)은 즉위하기 이전 진덕여왕 4년(650) 왕이 비단에 손수 짠 태평송(太平頌)을 갖고 당을 직접 자신의 눈으로 목격한 특이한 경험을 하였다. 물론 고구려, 왜, 당 등 당시 동아시아 세계를 상당 부분을 직접 방문한 경험을 가진 아버지 무열왕에 견줄 바는 아니지만 신라 국왕으로서는 매우 드문 사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문무왕의 세계관, 세계 인식 형성에 크게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게다가 당과 연합한 군사 작전을 펼치면서 이를 통해 또 다른 형태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였을 듯하다.

  이는 전쟁을 주도하고 마무리 지은 문무왕으로서는 그것이 이후 신라의 향방을 설정하는 데에 작지 않게 작용하였으리라 여겨진다. 앞서 언급한 서국식의 화장이나 동해 대왕암의 무덤 조영은 모두 대단히 파격적인 일로서 그렇지 않고서는 나오기 어려운 발상이었다. 그런 조치와 관련하여 조상 세계(世系)에 대한 인식에도 커다란 변화가 따른 사실도 주목해볼 대상이다.

  적어도 진흥왕대에 국사(國史)가 편찬되던 시점 이후 3성교립에 토대한 조상세계가 정통으로 자리 잡은 상태였다. 김씨족단에 의한 단독의 왕위 계승이 고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 혈연 중심의 시조(始祖) 인식에 입각한 일원적 세계를 정립시키지 못하였음은 신라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면모이다.  <계속>
경북대 명예교수 주보돈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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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출처 : 경북신문 (www.kbs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