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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왕들에게 길을 묻다] 신라 통합 왕조의 수백년간 존속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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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 작성일20-12-06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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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신문=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                    ↑↑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   

4. 통일 이후의 과제(3)
   그런데 통일 이후 중국식 오묘제가 수용되고 정착해 가는 과정에서 새로운 조상 세계가 수용되었다. '문무왕릉비'에 보이듯이 이 무렵부터 신라 조상 세계의 뿌리를 중국의 신화 전설시대에 등장하는 염제(炎帝)나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 투후( 侯) 김일제(金日 ) 등과 직결시키려는  체계를 마련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동시에 삼한을 삼국과 곧바로 등치시켜 일통삼한(一統三韓)의 논리를 앞세워 통일의 역사적 당위성, 정당성을 내세우기도 하였다.
   이처럼 자신의 조상 세계를 중국 신화전설 시대와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신라의 건국 기년 자체를 올림으로써 고구려·백제보다 건국의 시점이 한층 빠르며 문화적 기반도 훨씬 선진이었음을 드러내려고 하는 의도의 소산이다.
   이런 시간 폭의 상승은 곧 공간적인 너비, 즉 세계관의 확대와 어우러지는 변화라 할 수 있겠다. 신라인의 세계관에는 일대의 커다란 변동이 일어난 것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단순히 영역이나 인구만이 증가한 데에 머문 것이 아니었다. 그처럼 종적으로 조상세계를 늘리면서 횡적으로는 신라인의 세계관, 세계의식의 엄청난 확대·확장을 가져온 일대 사건이었다. 이제 기왕의 한반도 중심 삼국 사이의 대치 국면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진 새로운 세계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신라인의 생각과 활동도 달라짐은 지극히 자연스런 추세였다.
   그것은 신라인의 모험과 개척 정신으로 연동되었다. 이제 선진지역도 확장되고 선진문물의 대상도 달라졌다. 이들과 마음대로 접촉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된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문화적 기반도 다양하고 깊어졌으며 질적 수준도 저절로 한결 향상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측면의 일단을 '삼국유사' 의해편(義解篇)의 '귀축제사(歸竺諸師)'조에 실린 신라 승려들의 천축(인도) 대상 구법활동을 통해서 읽어낼 수 있다. 
   이 기사는 첫 머리에 밝혀두고 있듯이 인도를 다녀온 당나라 승려 의정(義淨, 635-713)이 쓴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에 근거를 둔 것이다. 거기에는 10명 남짓 신라 승려가 인도에 구법 활동을 하러 왔다가 단 한 명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한 사정을 전해주고 있다. 두 기록을 대비하면 약간의 출입은 엿보이나 일연이 의정의 책을 인용하면서 빚어낸 약간의 착각으로 여겨진다.
   의정은 671년 인도에 갔다가 25년 동안 머물다가 귀국하였다. 아마도 이때 인도 나란타(那蘭?)에 머물면서 현태(玄泰)와 같은 신라 승려를 직접 만났거나 아니면 거기에서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정보에 의거한 것으로 여겨진다. 의정이 인도에서 체재한 기간이나 당나라 귀국 이후의 사정을 고려하면 위의 기사에 보이는 신라 승려들이 인도로 간 것은 거의 문무왕과 신문왕대에 해당한다. 이때부터 신라의 구법승이 본격적으로 인도에까지 나아갔음이 감지된다.
   이후에도 8세기 혜초(慧超)의 순례를 고려하면 수많은 승려들이 역시 인도로 갔으리라 여겨진다. 이는 신라인들의 신세계·신문물에 대한 갈망, 탐구심의 정도를 반영한다. 미지의 세계에 과감하게 도전하고 개척해나간 정신의 일단을 보여준다.
   사실 그 결과로 신라 사회는 엄청난 변화를 겪고 새로운 수준의 문화를 일구었으리라 여겨진다. 당나라에서 7세기 중엽에는 이미 신라를 자신들과 비등한 문화 수준에 도달한 군자국(君子國)으로 인정하고 파견 사절(使節)을 선발하는 기준으로서 유교 경전에 밝고 바둑을 잘 두는 관료를 하였다는 사실은 그런 사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 무렵 일본에 파견된 신라 사신이 스스로를 애써 왕성국(王城國)임을 자처함으로써 외교적 마찰이 빚어지게 된 빌미가 된 사실도 그런 사정의 일단을 이해하는 데 크게 참고가 된다. 당시 신라 지배층 일각에서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을 서경(西京)이라 한 데에 빗대어 자신들의 왕도 금성(金城)을 동경(東京)이라고 부른 데서 그런 분위기가 충분히 느껴진다. 8세기에는 신라 문화가 절정기에 도달함으로써 엄청난 자부심을 갖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바로 이 무렵 왕경 우금리( 金里)에 사는 보개(寶開)란 여성의 아들이 바다를 매개로 장사하러 떠났다가 난파당해 남중국에까지 갔다가 살아서 돌아온 이야기는 해상 활동이 번성을 누리던 실상을 반영한다. 수십 년 뒤 해상왕 장보고(張保皐)가 출현하는 것도 결코 우연히 일시적으로 얻게 된 소산물이 아니었음을 시사해주는 사실이다. 이는 오래도록 선진의 문물을 갈구해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꿈꾸고 개척해온 노력의 결산이었다.
   서역 계통으로 추정되는 문화나 사람들이 신라에 들어온 점이나 신라의 존재가 아랍세계에까지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의 일이라 여겨진다. 신라인이 미지의 외부 선진 세계와 접촉을 갈망하고 꿈꾸면서 꾸준히 도전하고 일구어온 노력의 결과였다. 신라는 독자적인 힘으로 세계의 무대에 얼굴을 내밀었던 것이다.
   새로운 세계로의 진출을 능동적으로 추동해서 계기를 만들어준 것은 문무왕이었다. 스스로 문물의 수용에 과감하게 도전하고 그를 가로막는 한계를 철저히 부수고 뛰어넘는 실천의 모습을 보인 데서 비롯한 일이었다. 그런 사정을 신라인들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었음은 국왕의 생전 업적을 평가해 만든 시호(諡號) 속에 일정 부분 반영되어 있다.
   아버지 무열왕이 '무(武)'에 비중을 두었다면, 아들 신문왕은 '문(文)'에 초점을 맞추었음이 드러난다. 그에 견주어 문무왕의 시호는 '문무'의 두 방면에 걸쳐서 나타내었다. 통일 과업의 성공과 함께 수성의 토대를 마련하였다는 의미를 담고 있을 터이다. 기존의 틀을 부수고 새로운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기틀을 마련함으로써 신라 통합 왕조는 이후 수백 년 분열을 겪지 않고 존속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계속>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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