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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왕들에게 길을 묻다] 한국의 실크로드 초기 연구사, 20세기 유럽 탐험가들의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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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대 실크로드 중앙아시아연… 작성일20-12-15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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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명대 실크로드 중앙아시아연구원장 김중순[경북신문=계명대 실크로드 중앙아시아연구원장 김중순] '한국의 실크로드 연구사'라 함은 실크로드 연구의 주체가 한국인이거나 한국이라는 공간에서진행된 연구임을 의미한다. 이 경우 혜초는 아마도 최초의 실크로드 탐구자일 것이며, 그가 남긴 '왕오천축국전'은 최초의 실크로드 탐구 보고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실크로드가 학문의 대상이 된 것은 20세기 이후이다.
 
  권영필과 김호동은 한국에서의 실크로드학 혹은 중앙아시아학의 시기를 3기로 나누었다. 제1기는 20세기 초에서 해방 때까지였고, 제2기는 서역학과 동서교섭사, 중앙아시아학이라는 개념이 학계에 소개된 해방 후에서 70년대 말로 잡았다. 제3기는 1980년대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에 중앙아시아실이 생기고 현장 연구가 자유로워진 것과 함께 해외에서 연구자들이 귀국하던 시기로 잡았다.
 
  이 글은 주로 1기에 해당할 것이지만, 자료 수집이나 연구를 통하여 2기와 3기를 위한 기반을 마련했던 인물들을 살피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시기적으로는 유럽에서 실크로드학이 태동되던 때와 같은 시대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은 수집 혹은 약탈을 통해 엄청난 자료를 확보했지만, 우리는 매우 제한된 정보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실크로드학의 초기 연구의 주도권은 유럽이 가져 갈 수밖에 없었고, 연구의 성향 역시 문명 전파론에 근거한 유럽중심주의(Eurocentrism)의 제국주의적 성향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를 주도한 사람들 가운데 러시아 출신의 프르제발스키, 스웨덴 출신의 헤딘, 그리고 일본 출신의 오타니 등은 한국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측의 실크로드학에 대한 관심은 그들에 비해 절대적인 열세였지만, 몇 명 되지 않는 초기의 선구자들은 아무런 조직이나 체계가 없었음에도 나름대로의 연구 토대를 구축했고, 그들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2기와 3기도 가능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권영필은 선구자의 명단에 김중세와 한낙연을, 정광훈은 김구경, 이상백, 김태준 등을 올렸고, 박천수는 이구조를 올렸다. 이들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지만, 각각의 배경도 다르고 관심 분야도 다르다. 이들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으로 연구된 바는 없가 없지만, 한국의 초기 실크로드 연구사를 위해서는 반드시 정리될 필요가 있다.
 
I. 외국인 학자들

  1. 니콜라이 프르제발스키(Nikolay Przhevalsky, 1839~1888)

  리히트호펜이 실크로드를 명명하고 초기 유럽의 탐험가들이 소위 '발굴'과 '약탈' 작업을 벌인 것은 20세기 초반으로, 19세기 중반 이후 서구 제국주의의 팽창과 맞물려 있다. 자료를 확보한 유럽이 자연스럽게 실크로드의 연구에 착수하면서, 탐험가들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지대했다. 오늘날 한국의 실크로드 연구도 그런 맥락에서 출발해야 한다.
 
  은둔의 대륙 중앙아시아는 당시의 유럽인들에게 중요한 사냥감이었다. 인도에서 카슈미르 지방을 거쳐 티베트와 중앙아시아에 진출하려는 영국과 시베리아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해가려는 러시아는 거의 100여년 동안 경쟁하며 그야말로 '그레이트 게임'을 벌였다. 영국의 소설가 러디어드 키플링의 1901년 소설 'Kim'은 당시의 이러한 상황을 잘 대변해준다.
 
  러시아의 탐험가 프르제발스키가 등장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당시 러시아는 1860년에 청나라와 북경조약을 체결하고 우수리강 동편 연해주 일대를 할당받았다. 조선인들의 연해주 이민이 시작되었던 때이다. 이 지역에 대한 실태 조사를 위해 파견된 사람이 프르제발스키였다.
 
  그는 두만강 일대에 이르는 지역의 다양한 조사를 하고 연해주로 이주한 한국사람들의 실태에 대한 생생한 보고도 남겼다. 심지어 국경을 넘어 함경북도 경흥까지 방문했었으니, 육로로 한국을 조사한 최초의 러시아인이다.
 
  프르제발스키의 연해주-한국 탐험은 이후 Journey to the Ussuri Region (1867~1869)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는데, 한-러 교류의 초창기 연해주에 정착한 고려인들과 국경지역의 역동적인 삶이 생생한 기록으로 남아서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그는 1870년대에 이미 캬흐타에서 몽골 오르도스 지역과 청해성 일대, 신강성에서 천산을 거쳐 로프노르 호수에 이르기까지 무려 1만 킬로가 넘는 광범위한 지역을 답사했다. 중국 서북부내륙 통해서 실크로드를 넘어 티베트로 가려는 목표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가 가지고 온 엄청난 양의 동식물 표본들이 상트페테르부르그에서 전시되자 당시 러시아 사람들은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받았고, 실크로드는 순식간에 세계적인 관심 거리가 됐다.
 
  특히 그가 발견한 로프노르 호수는 가장 뜨거운 논쟁거리로 등장했다. 중국의 '史記'에 '鹽澤' 즉, 소금 호수라는 이름으로 나와 있는 곳이다. 아직 서양에서 실크로드 조사가 본격화되기 20년 전의 일이다. 프르제발스키는 이 호수가 원래 짠물인 소금호수였지만 수로가 바뀌면서 담수가 유입되어 담수호로 바뀌었으며, 원래 하나였던 것이 나중에 2개의 호수로 나누어졌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즉각적인 반대에 부딪혔다. 실크로드라는 이름을 처음 만들어낸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F.v. Richthofen, 1833~1905년)이 그것은 로프노르 호수가 아니라고 한 것이다. 중앙아시아는 물론 중국 내륙지역에 걸친 실크로드의 주요 지역을 방문한 적이 없었던 리히트호펜은 경쟁국 러시아의 무명 장교 프르제발스키의 주장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계속>
계명대 실크로드 중앙아시아연…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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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출처 : 경북신문 (www.kbs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