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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진 단편연재소설] 나비의 새벽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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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서유진 작성일19-09-22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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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서유진사랑만 있다면 행복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도스토옙스키
 
  비가 그치자 카페가 잠에서 깨어났다. 터져 나오는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장마 동안 슨 곰팡이를 싹 걷어냈다. 아직 바쿠스의 신이 왕림하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노을빛이 어둠을 조금 늦춰주었으면… 저녁 하늘에 무지개라도 걸렸으면…. 유라는 노을빛으로 붉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밖에서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가자니 말자니 옥신각신했다. 유라는 창문을 열고 머리를 내밀었다. 왜 이 카페가 싫다는 거야. 옛날에는 굉장한 노블레스 카페였지만 지금은 안 비싸다니까. 비렁뱅이가 이런 데 올 기회 있겠냐. 내가 집들이로 한 턱 쏠게. 몸이 마른 남자가 힐끗 이 층 창문을 쳐다보며 애원하듯 말했다. 선배, 다른 데 가. 여긴 정말 안 돼. 그 남자, 장민수였다. 그는 미팅 약속을 잡은 유라와 패거리들이 한 자리에 앉는 것을 꺼렸던 거였다.

  유라는 미팅 약속을 해준 날 밤을 떠올렸다. 밤 두 시쯤, 유라가 카페의 숙소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선물 받은 쇼핑백과 군것질거리를 담은 비닐봉지를 들고 고객의 승용차에서 내렸다. 남자가 유라 앞을 가로막았다. 남자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하, 한 번, 시, 시간을 내주세요. 말더듬이가 아니었는데 술 때문인가? 유라는 빤히 쳐다보았다. 얼큰하게 취한 남자는 건들건들 몸을 흔들며 너무 그러지 맙시다, 했다.

  유라는, 흘러내린 앞머리를 걷어 올리는 남자의 이마가 반듯하다는 생각을 하며 카페의 출입문을 향해 돌아섰다. 남자가 따라와 손목을 잡자 유라는 진이가 생각나 조금 세게 가슴팍을 떠밀었다. 격투를 연마한 팔의 힘이 좀 과했던지 남자가 비틀, 하더니 중심을 못 잡고 넘어졌다. 바닥에 쏟아진 것들을 집어 드니 빗물이 묻어 화가 치밀었다. 남자는 반듯이 누운 채 일어나지 않았다. 이봐요, 일어나요. 유라가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는데 기절한 듯 기척이 없었다. 얼굴을 들여다보니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지 않은가. 어머나, 놀랐잖아요. 남자가 딴청을 부렸다. 하늘이 캄캄합니다, 너무 캄캄해요. 깜짝 놀랐네. 머리 부딪힌 줄 알았잖아요! 뭐해요, 빨리 일어나지 않고! 유라는 누워있는 한심한 머리통을 한 대 갈겨주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했다. 대신에 다리를 번쩍 들어 올렸다. 얍! 왼발을 허리께쯤 높이로 차고 접으며, 발이 땅에 닿기 전에 몸을 비틀어 오른발로 공중 돌려찼다. 이른바 나래차기다. 하늘이 기우뚱 기울었고 가로등이 허리를 굽혔다. 와! 남자가 벌떡 일어나 손뼉 쳤다. 두 배 드릴게요. 제 이야기만 들어주면 돼요. 돈이라면 눈에 불을 켜는 유라에게 솔깃한 제안이었다. 서비스료가 두 배, 그것도 대화만 한다는데 못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남자에게 미팅 날짜를 잡아준 건 그 때문만은 아니라며 유라는 궁색한 핑계를 댔다. 진이의 일을 추궁하고 여차하면 한 방 날려줄 셈이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인간의 신체였다. 몸의 활동이 엔도르핀을 증가시키니 나래차기가 유라의 기분을 유쾌하게 만들었다. 기분이 유쾌해지면 선심을 쓰지 않나. 유라는 그렇지 않아도 심각하게 따져야 할 일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그만 엉뚱한 말을 뱉어버렸다. 왜 이런 곳에 드나들며 카페 여자에게 집착해요? 이런 데 오지 말고 격투기나 택견 같은 운동이라도 좀 배워 보시지. 말해놓고 보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넌 왜 여기서 이런 일 하는 거니? 이런 일이 어때서. 사람은 자존감이 높아야 해. 나를 인정하고 사랑해줄 이는 나 자신과 내가 버린 하나님뿐이야.
 
창가에서 옥신각신하던 남자들이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7번 룸으로 들어가."

  혜경이 눈가에 잔주름을 만들며 말했다. 누가 연락했는지 진이가 룸에 먼저 들어와 남자들 사이에 앉아 있었다. 고양이 앞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는 혜경이 진이를 위해 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 테이블 끝을 멍하니 내려다보는 진이의 눈은 체념을 의미했다. 어쩌면 고통을 이기고 자유를 얻은 자의 평안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술을 못 마시는 진이가 곧잘 홀짝였고, 남자를 보는 눈빛이 무심했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마치 무관한 사람에게 대하듯, 남자에게 미소를 짓기도 했는데 아주 자연스러웠다. 진이는 유라의 옷에 그려진 금박 나비를 물끄러미 보더니 제 목걸이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거기에도 엄지손톱만 한 나비가 새겨져 있었다. 그윽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진이의 눈이 팔랑거리며 날아가는 나비를 쫓는 듯했다.  <계속>
소설가 서유진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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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출처 : 경북신문 (www.kbs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