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진 단편연재소설] 휴식의 서표 (2) > 실시간

본문 바로가기


실시간
Home > 건강 > 실시간

[서유진 단편연재소설] 휴식의 서표 (2)

페이지 정보

소설가 서유진 작성일19-11-11 19:03

본문

↑↑ 소설가 서유진소신은 중대하고 갈길은 멀다. 그것을 각오하고 사명감에 철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논어
 

  어둑한 방, 침대 아래에는 대여섯 권의 책이 책 등을 보인 채 엎어져 있었다. 그에게는 이것저것 참고 문헌을 뒤적이다가 읽던 책 페이지에 서표를 끼우는 대신 책을 펼친 채 엎어두는 습관이 있었다. 부지런한 그처럼 금방이라도 일어날 듯 책이 등을 보이고 엎드린 모습은, 피로에 지친 그가 금방 일어날 테니 잠깐만, 하고 바닥에 이마를 댄 채 엉덩이를 위로 쳐들고 등을 구부린 모습과 흡사했다.

  그는 옆에서 자고 있는 아내를 힐끗 보고는 콘솔의 독서등을 켰다. 침대 아래로 팔을 내려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집어 올려 가슴 위에 세웠다. 등을 침대에 찰떡처럼 붙이고 턱을 쇄골에 댄 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을 든 팔이 뻐근해질 때쯤 피로가 다시 잠을 불러오는 거였다. 이러고 책을 읽는 꼴이 엄청 게을러 보일 테지. 그는 혼잣말을 하며 흐린 불빛 속에 어른거리는 글자를 노려봤다. 파이 속 애플 잼 같은 아이디어가 번개처럼 떠오르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한숨을 쉬고는 책장을 홱, 짜증내며 넘겼다. 찍, 종이 찢기는 소리. 길게 찢어진 한 페이지의 갈라진 선을 보는 순간, 두 쪽으로 금이 간 자신의 뇌가 보이더라며 머리를 흔드는 그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는 자신의 부정적인 생각을 자책하면서 책을 눈 가까이 바투 당겼다. 벌써 몇 번이나 강의 연습을 하고 시간을 맞춰보았다. 1분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제한된 시간에 마쳐졌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너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예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자 머릿속에 벌떼가 와글거리고 이 생각 저 생각이 극기 훈련을 해 온 운동장 트랙을 달리고! 달리고! 달리고! 헉헉. 그는 점점 숨이 차오르는 자신의 호흡기와 평소 간혹 이상한 징후를 보이는 폐와 심장을 잠깐 염려했다. 준비에 철저했던 자신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아니 준비는 미리부터 했다. 두뇌 회전이 안 되는 까닭이 무엇일까. 뇌세포가 죽어버린 게 수면 부족과 잦은 허기 때문일까.

  한 달 전에 모니터에 뜬 연수 자료를 본 옆자리 동료가 말했다.

  "대충 해요, 그리 애쓸 필요 없어요."

  대충이 동료의 삶의 방식인지 몰라도 자신의 방식은 아니었다. 빨리 연수를 끝내고 칼 퇴근하고 싶어서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130명의 교사들에게 무익한 시간을 보내게 해서는 안 되었다. 남의 시간을 일 분이라도 허비해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생활신조, 매사를 벼린 칼날로 싹둑 자르는 그가 우유부단의 시간 속에 어정쩡 한쪽 발을 담그고 있으니 그는 답답했다. 답답한지고! 130명×40분이면 5,200분=86.6666666667시간. 3일 반나절의 그 아까운 시간을 즐겁지 않은 강의로 흘려보낼 수는 없어!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침대 밑에 엎드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또 하나의 책을 집어 들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었다. 키에르 케고르와 창의개발 교육 연수와 무슨 연관이 있다고. 흠, 동절기 자동차 관리 요령이 연구 발표거리가 돼? 자동차를 모는 사람이면 상식적인 내용을 연구 발표랍시고 하는 동료나 그런 것이 통하는 학교 분위기에 그는 실망했다.

  학교의 연구 발표 분위기를 쇄신하고 싶었던 작년 그날, 그는 학생 생활지도에 칸트의 실천 이성을 빗대어 발표했다. 그 누구에게도 보내지 않았던 박수갈채가 그에게 쏟아졌다. 그는 한 번 더 그런 강의를 해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젊은 교사들에게 받는 주목이 기분 좋은 일이었다. 구태의연에는 희망이 없다고 그는 입버릇처럼 말했는데 지금은 자신이 그 길로 가는 듯했다. 그는 읽던 책을 바닥에 툭 던졌다. 책이 문갑 모서리에 부딪쳐 사지를 비틀며 널브러졌다.  <계속>
소설가 서유진   kua348@naver.com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개인정보취급방침 서비스이용약관 이메일무단수집거부
Copyright © 울릉·독도 신문. All rights reserved.
뉴스출처 : 경북신문 (www.kbs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