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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한 경북 영양 한양조씨의 충절(忠節) 조씨 가문 전체가 의병에 참가하기는 전국에서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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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취재팀 작성일21-06-22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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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신문=특별취재팀] 임진왜란 때 가문 전체가 의병에 참가해 나라를 위해 헌신한 사례가 6월 의병의 달을 보내면서 화제가 되고 있다.
   매년 6월1일이 되면 대구 망우공원에 세워진 충의단에서 의병을 기리기 위해 실시해 오던 추모행사가 지난해와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2년째 중단돼 안타까움을 더해주고 있다.

  임진왜란(1592-1598년)은 우리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엄청난 민족적 수난으로 기록되고 있다. 국가적 위기를 한 가문이 총궐기해 구국운동에 나선 것은 이례적이다.
   한양조씨 가문은 영남에서 최초로 의병이 일어나 나라를 구하는 데 참가했다. 영남은 왜적의 침략 길목에 위치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또한 의병도 영남에서 선도적으로 봉기해 국난극복에 앞장섰다.
   이에 의병장 곽재우 장군 후손을 비롯한 한양조씨 의병 후손과 영남의병 후손들이 뜻을 모아 영남이 중심지였던 대구 망우공원에 충의사의 영령을 위로하기 위해 임란호국 '영남충의단'을 건립하고 영남의병 315위 위패를 봉안해 매년 6월1일 의병의날 제향을 올려 위국충절을 기리고 있다.
   충의단에 봉안된 의사들 중에 마을 전체가 의병에 참가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왜군과 싸워 혁혁한 공을 세운 가문은 영양의 한양조씨가 전국에서 유일하다.
   곽재우 장군의 서신을 받은 조광의(51세)는 맏집 조카 조검(23세) 조임(20세)과 아들 조건(23세) 조전(17세)을 거느리고 서둘러 준비를 해 긴긴 행렬을 이루며 포산에 도착, 곽재우 장군 휘하에서 참전, 화왕산 전투에서 선봉장이 돼 크게 전과를 올렸다.
   이때 조검은 선친으로 물려받은 재산 쌀 오백 섬, 기마 수십 필, 가신 40명을 보내 힘을 보탰다.
   그 공로로 조광의는 판결사, 조검은 선무원종 2등공신의 녹훈을 받았다. 아울러 조임이 남긴 시 '남정(南征)'은 임진왜란 때의 기행시 가운데 뛰어난 작품으로 학계에서 평가받고 있다.
   그 후 조검(趙儉)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고령으로 참전치 못함을 한탄하고 아우 조임(趙任)과 함께 뒤뜰에 단을 쌓고 나라와 임금의 안녕을 빌었다니 그분들의 애국충절은 나이가 들어서도 가히 변함이 없었음이라 그때 쌓았던 단은 없어졌으나 공(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후세 사람들이 그 근처에 세운 비(碑)와 비각이 있다.
   이들의 공적은 '숭정처사수월조공검축천단비'에 소상하게 기록돼 있다.
                       ↑↑ 영양 일월 도계리 한양조씨 영양입향 향조 조원의 종택   
특히 이 같은 공적을 인정받아 다섯 분의 위폐가 대구 망우당공원 내에 '임난호국영남충의단'에 봉안됐으니 실로 한 가문의 명운을 건 애국충절이라 할 수 있다.
   한양조씨는 기묘사화의 화를 피해 한양에서 낙남한 조운종(趙云從:靜庵의 三從祖父)의 증손인 조원(趙源)이 1535년에 영양에 정착하면서 세거하게 됐다.
                       ↑↑ 망우공원 임란 추모탑   
그들은 정암 선생의 뜻을 받들어 충효를 가문의 제일 가치로 실천해 오던 중 1592년(선조1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원(趙源)의 둘째 아들 조광의(趙光義)가 자질(子姪, 맏집조카儉과 任, 아들 健과 佺)을 거느리고 곽재우(郭再祐) 장군 의진에 참여했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더구나 조원의 장남 광인(光仁)은 일찍 사망해 맏조카는 주손임에도 불구하고 절손의 위기에 처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의병으로 참전한다는 것은 그 당시 사회적 환경에서는 엄청난 애국심으로 무장하지 않고는 도저히 실행키 어려운 일이라 할 것이다.
                       ↑↑ 영양읍 상원리 수월의 축천단비   
평소 이분들의 애국심과 인품을 들어오던 곽재우 장군은 조검(趙儉)에게 함께 참전해 주기를 청하는 서신을 보냈으니 그 때 주고받은 서신이 '수월일고(水月逸稿):조선 중기의 학자 趙儉(1570-1664)의 시문집'에 남아 있고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곽재우장군과 주고 받은 서신   
◆ 곽재우 장군 서신 요약/원문 사진 참조
   나라에 불행이 있어 더러운 섬 오랑캐가 제멋대로 날뛰니 이는 참으로 국가 존망의 시기입니다.(중략) 아 ! 슬프옵니다.
   바야흐로 국가가 창이(瘡痍)한 때를 당하여 스스로 그 마음을 지키고 진 앞에서 싸워 국가와 시종(始終)을 함께 할 이가 또 몇 사람이 있겠습니까? 적이 듣자옵건데 집사의 형제께서 바닷가에 은거하면서(중략) 바야흐로 의병을 모집하는 의논이 있었다 하니 힘을 얻게 됩니다(중략) 오직 바라건데 즉일로 포산(苞山)에 이르러 함께 의리를 이루는 것이 하찮은 이 사람의 바라는 바이고 못나고 둔한 이 사람을 채찍질해 주시면 재우(再祐)가 은혜를 받는 것이 큽니다.
 
                    ↑↑ 곽재우장군과 주고 받은 서신수록집   
◆ 조검의 답신
   나라의 일이 이에 이르렀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뜻밖에 귀한(貴翰)이 먼저 왔기에 봉함을 뜯어 공경히 읽으니 글자 하나 읽을 적마다 눈물이 백 방울 떨어졌습니다(중략) 집안의 자산과 개인의 저축을 다 털어내어 오직 쌀 오백 섬, 기마 수십 필, 가신 40명 만으로 오는 28일에 포산(苞山:현풍현의 옛 이름)에 도착하여 막하께 나아가 뵈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초초(草草)한 제구(諸具)가 떠벌리고 떨치기에 부족한 것이 한스럽습니다(중략) 바라건데 더욱 충의(忠義)를 증가하여 국가의 바램에 부응해 주시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 망우공원 임란의사 위패를 모신 곳   
곽재우 장군과 조검(趙儉)이 주고받은 서신은 '수월일고(水月逸稿):조선 중기의 학자 趙儉(1570-1664)의 시문집'에 남아 있다. 
특별취재팀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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