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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석(昔)씨 왕들의 이야기] 17. 신라 제12대 석첨해왕의 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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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 작성일20-04-12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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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신문=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                  ↑↑ 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첨해왕 가계]
 
  성은 석(昔)씨, 이름은 첨해(沾解), 왕호(王號)는 이사금(尼師今)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이해이질금(理解尼叱今)'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라의 제9대 석벌휴왕(昔伐休王, 재위184∼196)의 손자로, 아버지는 세신갈문왕(世神葛文王) 골정[骨正, 홀쟁(忽爭)이라고도 한다]이며 어머니는 구도갈문왕(仇道葛文王)의 딸인 옥모부인(玉帽夫人) 김씨(金氏)이다.
 
  제11대 석조분왕(昔助賁王, 재위 230∼247)의 친동생이며, 왕비와 자녀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신라 제12대 석첨해왕(沾解王)은 서기247년(조분 18) 형인 석조분왕의 뒤를 이어 왕좌에 올랐다.

  [조상에 대한 예우]
 
  서기247년(정묘년 왕원년) 7월에 시조사당에 참배하고 아버지 골정(骨正)을 세신갈문왕(世神葛文王)으로 삼았다. ※논(論)컨데 한(漢)나라 선제(宣帝)가 즉위하자 유사(有司)가 아뢰기를 남의 뒤로서 제왕이된 자는 그 부모를 높혀서 제사하지 않을 수 없다하니, 제(帝)를 낳은 아버지를 친(親)이라 칭하고 시호(諡號)를 도(悼)라하고, 어머니를 도후(悼后)라하여 제후(諸侯)왕에 비(比)하였는데 이는 경의(經義 ^ 경서<經書>란 뜻으로, 사서 오경 등 유교 경전의 총칭)에 합당하고 만세의 법이 되었다.
 
  그런 까닭으로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와 송(宋)나라 영종도 이 법을 시행했다. 신라는 왕의 친족으로부터 들어서서 대통을 계승하는 임금이 그 아버지를 높이 봉(封)하여 왕으로 칭하지 않음이 없으며 세신갈문왕(世神葛文王)의 사친(서자의 생모 또는 종실에 들어온 후 즉위한 임금의 친어머니를 말함)에 대하여 시호(諡號:공덕을 기려 죽은 후에 주던 이름)를 칭하는 것이 이때부터 시작이 되었다. 석첨해왕은 왕위에 오른 뒤에 아버지인 골정을 세신갈문왕으로 봉하였다.
 
                                          [치세기록]
 
  서기248년(무진년 왕2년)에는 이찬 장훤(長萱)을 서불한(舒弗限)으로 삼아 국정을 맡겼다. 한편 왕은 백성들의 삶을 돌아보기 위하여 고을들을 순회하면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으면서 농민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첨해왕은 조분왕 때에 신라의 북쪽 변경을 자주 침범했던 고구려와는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었다.
 
  서기249년(첨해 3)에는 양부(良夫)를 이찬으로 임명하였다. 궁궐 남쪽에'도당(都堂)'이라고도 하는'남당(南堂)'을 지어 왕실과 중앙정부를 분리하여, 서기251년(첨해 5)부터는 그곳 남당(南堂)에서 정사(政事)를 처리했다. 그 해에 왕은, 한지부(漢紙部)사람 부도(夫道)는 집이 매우 가난했으나 남에게 아첨함이 없고 글씨(文筆)와 산수(算數)를 잘하여 당시에 이름이 났으므로 그를 불러 아찬으로 임명하고 궁의 재산과 창고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겼다.
 
  백제와는 국경에서 잦은 전투가 있었고, 백제로부터 화친 요청도 있었으나 이를 거절하므로 백제와는 계속 대립 상태였다.
 
                                            신라에 복속해 있던 사량벌국(沙梁伐國:지금의 경북 상주)이 배신해 백제와 손을 잡자 석우로(昔于老) 장군을 보내 멸망시키고 주(州)를 설치했다. 이곳은 처음에는 상주(上州)라고 하였으나, 뒷날 경덕왕(景德王) 때에 상주(尙州)로 명칭이 바뀌었다.
 
  서기253년(계유년 왕7년) 4월에 용이 동쪽 못에 나타나서 오랫동안 머물다가 날아가고, 금성(金城)남쪽에 누었던 버드나무가 스스로 일어나는 기적 같은 일이 있었다. 5월부터 7월에 이르기까지 비가 오지 않으므로 왕은 신라 시조사당과 명산(名山)에 기우제를 지내니 비가 내리기는 하였으나 이해 흉년이 들어서 도적이 많았다.
 
  서기255년(을해년 왕9년) 9월에 백제가 군사를 일으켜 변방을 침범하므로 일벌찬 익종(翊宗)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이를 괴곡(지금의 괴산) 서쪽에서 맞아 싸웠으나 패하고 일벌찬 익종도 괴곡 싸움에서 전사했다. 10월 백제가 또 봉산성(烽山城 : 지금의 경상북도 榮州로 추정됨)을 공격하였으나 성은 점령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서기259년 가뭄이 심하여 농작물과 수목이 말라죽는 한재로 생활이 흉흉하고 민심이 불안하여 백성들이 곤궁할 때, 왕께서 직접 농촌을 찾으시어 위로와 격려를 하시었다. 이듬해인 260년(경진년 왕14년) 여름에서야 비가 내렸는데, 가뭄 뒤에 내린 폭우로 인하여 산이 40여개소나 무너지고 농토와 농작물이 유실되는 등 많은 피해를 입었다. 7월에는 패성(혜성)이 동방에 나타나 사라질 줄 모르고 계속 머물다가 25일만에 사라졌다.
 
  서기261년 2월에 달구벌(達丘伐 : 지금의 대구)에 성(城)을 쌓고 내마극종(柰麻克宗)을 그 성주로 임명하여 성을 지키게 하였다. 서기261년(신사년 왕15년) 12월 28일 석첨해왕께서 갑자기(死因 不明) 돌아 가셨다. 첨해왕은 아들이 없었으므로 석조분왕(신라 제11대)의 사위인 김미추(金味鄒, 재위 262~284)가 김씨로서는 처음으로 왕좌(제13대)에 오르게 되었다.  <계속>
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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