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만석 부자 살던 풍요로운 마을 새마을사업 성공 새긴 `환서 2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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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 작성일20-05-24 19:46본문
↑↑ 환서2리 전경
[경북신문=김영식기자] 양남면 환서2리는 구만(九萬)마을이라는 단일 마을로 구성됐다. 구만마을은 약 400년 전에 윤씨성을 가진 사람이 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 훗날 너른 들판에서 9만석을 거둬들이는 엄청난 부자가 살았다고 해서 구만(九萬)마을이라고 불렀다. 또 마을 앞 동미산이 거불모양처럼 생겼다고 해서 '거북 구(龜)'자를 써서 구만(龜萬)이라고도 불렀던 적이 있다.
↑↑ 월성원전 제2발전소 정비기술부 직원들이 환서2리를 찾아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구만마을 앞으로 흐르는 하천변에는 수령이 오래된 홰(회화)나무가 무리지어 있다. 이 나무들의 가지는 과장을 좀 보태서 10리나 늘어져 있다고 말할 만큼 풍성하다. 환서2리 새마을지도자 최정호씨는 "지금은 말랐지만 어린 시절에는 이 나무들 아래로 맑은 물이 흘러 여름철에 멱을 감고 놀았던 기억이 있다"며 "'홰나무 괴(槐)자'를 써서 괴정자라고 불렀고 이 하천 앞에 펼쳐진 괴정자들은 양남면에서 가장 많은 수확을 올린 농토였다"고 말했다. 그래서 구만석이나 거둬들인 부자가 나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부자 집안은 그리 오래 구만석 살림을 대물림하지 못했다. 구만마을 앞에 거북이 등처럼 둥글게 보이는 동미산에 묘를 쓰면 마을사람들에게 화를 미치고 급기야 마을이 망한다는 전설이 전한다. 그리고 묘를 쓴 사람은 흉한 꼴을 보게 된다고도 했다. 그런데 구만석 부자가 동네사람들 몰래 이 산의 봉우리에 묘를 쓰는 일을 저질렀다. 그 후부터 구만석 부자의 집안은 서서히 몰락했다고 한다.
↑↑ 환서2리의 산역사라고 할 수 있는 이봉곤 전 이장과 김시준 노인회장이 젊은 시절 새마을운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구만마을은 67가구에 13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순수 농촌인 구만마을을 지켜온 두 사람의 원로는 이봉곤(83) 전 이장과 김시준(84) 노인회 회장이다. 이봉곤 전 이장은 "구만마을은 70년대 초 양남면에서 가장 먼저 상수도가 보급된 마을"이라고 자랑스러워 했다.
이 전 이장은 마을 초입에 놓인 폭 6m, 길이 80m의 구만다리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1975년 당시 마을 이장이면서 새마을 지도자였던 이 전 이장은 "하천을 건너야 마을로 들어올 수 있어서 주민들의 어려움이 많았다"며 "당시 48 가구의 주민들이 일제히 모금을 해 큰 소 한 마리 값인 12만원을 모아 경주시나 경북은 물론 중앙정부로부터도 지원 한 푼 받지 않고 주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갹출하고 모래와 돌을 손수 져나르며 직접 마을사람들 손으로 만든 다리가 구만다리"라고 설명했다.
↑↑ 1970년대 새마을 사업으로 주민들이 손수 만든 구만다리. 지금은 낡고 위험해 새 다리를 놓아야 할 형편이다.
다리가 완성되고 난 뒤 마을을 방문한 박돈양 당시 월성군수는 한 번 둘러보고 나서 빈손으로 훌쩍 떠났는데 그 모습이 못내 섭섭했다고 한다. 그때 이 전 이장은 마을을 떠나는 박 군수의 뒤통수에 대고 "주민들이 각고의 노력으로 만든 다리를 둘러보러 오면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떠나는 군수가 어디에 있느냐"며 "세상에 이런 행정이 대한민국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고 욕을 퍼부었다고 한다. 석 달 후 구만다리 건설의 사례는 월성군의 새마을운동 모범사례로 꼽혔다.
이 전 이장은 "몇 년 전 태풍 차바로 난간이 무너지고 지은지 오래돼 안전진단에서 D등급을 받았지만 지금도 그 다리를 건널 때마다 주민들의 협동심과 잠재력을 생각하게 되고 자랑스러운 마음을 가진다"며 "경주시가 50억원 정도의 예산을 들여 새로운 다리를 놓아준다고 하니 주민들은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 환서2리의 원로와 주민들이 마을회관 앞 정자에 앉아 환담을 나누고 있다.
김시준 노인회장은 젊은 시절 울산우체국에 근무하다가 정년퇴직 후 마을로 돌아왔다고 한다. 김 회장은 "인근 나산리에 자리를 잡은 입향조 김제학 공의 후예라는 자부심이 있고 이 마을에는 17대째 살아가고 있다"며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을 하던 젊은이들이 대부분 나처럼 외지로 돈벌이로 나가지만 않았다면 이 마을이 훨씬 더 잘사는 마을로 남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했다.
구만마을에는 약 20가구가 외지에서 들어와 전원주택을 짓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김 회장은 "외지에서 이 마을에 이주해 온 분들 가운데 젊은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마을사람들과의 소통이 조금 부족하다는 느낌이 있다"며 "주민과의 갈등은 물론 전통미덕마저 무너져 가는 안타까움이 있어 하루빨리 서로 화합하는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밝혔다.
↑↑ 구만마을 앞 하천가에 무리지어 있는 홰나무.
월성원전의 환서2리 자매부서는 제2발전소 정비기술부다. 새마을지도자 최정호씨는 "자매부서 직원들이 수시로 마을을 찾아와 서로 소통하며 교류를 넓히고 있다"며 "그들과의 소통이 원전에 대한 주민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고 말했다.
정비기술부 오정호 과장은 "최근 코로나19로 말미암아 교류가 뜸해서 아쉬웠다"며 "이제는 안정세로 접어들어 마을을 자주 찾아가 서로 도울 일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나서겠다"고 밝혔다.
김영식 7494929@naver.com
[경북신문=김영식기자] 양남면 환서2리는 구만(九萬)마을이라는 단일 마을로 구성됐다. 구만마을은 약 400년 전에 윤씨성을 가진 사람이 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 훗날 너른 들판에서 9만석을 거둬들이는 엄청난 부자가 살았다고 해서 구만(九萬)마을이라고 불렀다. 또 마을 앞 동미산이 거불모양처럼 생겼다고 해서 '거북 구(龜)'자를 써서 구만(龜萬)이라고도 불렀던 적이 있다.
↑↑ 월성원전 제2발전소 정비기술부 직원들이 환서2리를 찾아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구만마을 앞으로 흐르는 하천변에는 수령이 오래된 홰(회화)나무가 무리지어 있다. 이 나무들의 가지는 과장을 좀 보태서 10리나 늘어져 있다고 말할 만큼 풍성하다. 환서2리 새마을지도자 최정호씨는 "지금은 말랐지만 어린 시절에는 이 나무들 아래로 맑은 물이 흘러 여름철에 멱을 감고 놀았던 기억이 있다"며 "'홰나무 괴(槐)자'를 써서 괴정자라고 불렀고 이 하천 앞에 펼쳐진 괴정자들은 양남면에서 가장 많은 수확을 올린 농토였다"고 말했다. 그래서 구만석이나 거둬들인 부자가 나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부자 집안은 그리 오래 구만석 살림을 대물림하지 못했다. 구만마을 앞에 거북이 등처럼 둥글게 보이는 동미산에 묘를 쓰면 마을사람들에게 화를 미치고 급기야 마을이 망한다는 전설이 전한다. 그리고 묘를 쓴 사람은 흉한 꼴을 보게 된다고도 했다. 그런데 구만석 부자가 동네사람들 몰래 이 산의 봉우리에 묘를 쓰는 일을 저질렀다. 그 후부터 구만석 부자의 집안은 서서히 몰락했다고 한다.
↑↑ 환서2리의 산역사라고 할 수 있는 이봉곤 전 이장과 김시준 노인회장이 젊은 시절 새마을운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구만마을은 67가구에 13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순수 농촌인 구만마을을 지켜온 두 사람의 원로는 이봉곤(83) 전 이장과 김시준(84) 노인회 회장이다. 이봉곤 전 이장은 "구만마을은 70년대 초 양남면에서 가장 먼저 상수도가 보급된 마을"이라고 자랑스러워 했다.
이 전 이장은 마을 초입에 놓인 폭 6m, 길이 80m의 구만다리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1975년 당시 마을 이장이면서 새마을 지도자였던 이 전 이장은 "하천을 건너야 마을로 들어올 수 있어서 주민들의 어려움이 많았다"며 "당시 48 가구의 주민들이 일제히 모금을 해 큰 소 한 마리 값인 12만원을 모아 경주시나 경북은 물론 중앙정부로부터도 지원 한 푼 받지 않고 주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갹출하고 모래와 돌을 손수 져나르며 직접 마을사람들 손으로 만든 다리가 구만다리"라고 설명했다.
↑↑ 1970년대 새마을 사업으로 주민들이 손수 만든 구만다리. 지금은 낡고 위험해 새 다리를 놓아야 할 형편이다.
다리가 완성되고 난 뒤 마을을 방문한 박돈양 당시 월성군수는 한 번 둘러보고 나서 빈손으로 훌쩍 떠났는데 그 모습이 못내 섭섭했다고 한다. 그때 이 전 이장은 마을을 떠나는 박 군수의 뒤통수에 대고 "주민들이 각고의 노력으로 만든 다리를 둘러보러 오면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떠나는 군수가 어디에 있느냐"며 "세상에 이런 행정이 대한민국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고 욕을 퍼부었다고 한다. 석 달 후 구만다리 건설의 사례는 월성군의 새마을운동 모범사례로 꼽혔다.
이 전 이장은 "몇 년 전 태풍 차바로 난간이 무너지고 지은지 오래돼 안전진단에서 D등급을 받았지만 지금도 그 다리를 건널 때마다 주민들의 협동심과 잠재력을 생각하게 되고 자랑스러운 마음을 가진다"며 "경주시가 50억원 정도의 예산을 들여 새로운 다리를 놓아준다고 하니 주민들은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 환서2리의 원로와 주민들이 마을회관 앞 정자에 앉아 환담을 나누고 있다.
김시준 노인회장은 젊은 시절 울산우체국에 근무하다가 정년퇴직 후 마을로 돌아왔다고 한다. 김 회장은 "인근 나산리에 자리를 잡은 입향조 김제학 공의 후예라는 자부심이 있고 이 마을에는 17대째 살아가고 있다"며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을 하던 젊은이들이 대부분 나처럼 외지로 돈벌이로 나가지만 않았다면 이 마을이 훨씬 더 잘사는 마을로 남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했다.
구만마을에는 약 20가구가 외지에서 들어와 전원주택을 짓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김 회장은 "외지에서 이 마을에 이주해 온 분들 가운데 젊은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마을사람들과의 소통이 조금 부족하다는 느낌이 있다"며 "주민과의 갈등은 물론 전통미덕마저 무너져 가는 안타까움이 있어 하루빨리 서로 화합하는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밝혔다.
↑↑ 구만마을 앞 하천가에 무리지어 있는 홰나무.
월성원전의 환서2리 자매부서는 제2발전소 정비기술부다. 새마을지도자 최정호씨는 "자매부서 직원들이 수시로 마을을 찾아와 서로 소통하며 교류를 넓히고 있다"며 "그들과의 소통이 원전에 대한 주민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고 말했다.
정비기술부 오정호 과장은 "최근 코로나19로 말미암아 교류가 뜸해서 아쉬웠다"며 "이제는 안정세로 접어들어 마을을 자주 찾아가 서로 도울 일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나서겠다"고 밝혔다.
김영식 749492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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