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석(昔)씨 왕들의 이야기] (제35화) 숭신전 창건과 반월성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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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 작성일20-08-23 19:19본문
↑↑ 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경북신문=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 시조 석탈해왕의 신위(神位)를 모신 신전(神殿)을 숭신전(崇信殿)이라고 한다.석(昔)씨의 시조이며, 신라 제4대 왕이신 석탈해왕의 신위(神位)를 모시고 향제(享祭)를 올리는 건물인 숭신전(崇信殿)은 신라궁궐 안에서 가장 높은 명소인 반월성 옛터 7만여평을 사패지(賜牌地 : 임금이 내려준 땅)로 하사(下賜) 받은 반월성 언덕 중앙에 초석을 잡고 이조 광무(光武) 2년(서기1898년)에 건립하여 시조 탈해왕의 신위(神位 / 평민의 경우는 위패를 말함)를 모시고 매년 봄 춘분(春分)날에 향사를 올리게 되었는 바 숭신전은 경상북도 문화재 제255호로 지정되어 있다.
숭신전(崇信殿)은 대한제국 시절(광무 2년), 당시 경주군수 권상문이 석탈해왕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이조 조정에 제안하고, 본손 필복(必復)이 관계요로 및 사림(士林)의 협조를 받아 광무와이 하사한 땅인 반월성 언덕위에 전각(殿閣) 건물을 건립한 후 시조왕 신위를 봉안(奉安)하고 향사(享祀)를 드리게 되었다.
이어서 광무10(병오 서기1906)년에 숭신전호(崇信殿號) 현판을 사액(賜額) 받았다.
임금이 내린 현판(편액)은 사액(賜額)이라 하며 왕이 직접 쓰거나 당대 최고의 명필을 천거하여 쓰게 합니다. 또한 왕이 내린 사액 현판은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하며, 왕이 직접 쓴 글씨는 전서체로 어필(御筆)이라 글 옆에 작게 새겨집니다. 석탈해왕의 신위를 모시고 향제를 올리는 사당(祠堂)에는'숭신전(崇信殿)'이라는 이름으로 사액 되었습니다. (참고 : 朴씨는 숭덕전(崇德殿), 김씨는 숭혜전(崇惠殿)으로 사액 되었다.)
사액(賜額)은 임금이 사당(祠堂), 서원(書院), 누문(樓門) 등에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친히 내리던 것을 말합니다. 또한 역대 왕의 시조들을 모시는 사당에 '숭(崇)'자와 '전(殿)'자가 들어간 이름은 신하의 건의 아래 임금이 직접 내린 경우가 많습니다. 즉 아무나 '숭(崇)'자와 '전(殿)'자를 쓰지 못한다는 규례가 있다고 합니다.
서기1912(임자)년 석씨의 사폐지로 하사된 땅인 반월성 전구역이 토지조사 때 국유지로 편입되자 후손인 월남(月楠)과 문호(文浩)가 이의 회복을 위해 노력 중 돌아가시고 개간된 토지만은 당시 종중에 관여하던 'ㅂㅈ' 개인명의로 신고되었다, 그 후 1926년에 국책으로 공원시설에 수용되자 보상금 7,000원은 신고자 개인이 수령하였다, 이 내용을 알게된 본손 천대(千大:보명은 在麟)와 봉우(鳳佑:자는 규복)가 보상금으로 대토(代土)라도 하기 위해 보상금 수령자를 만났으나 "내 이름으로 된 땅을 내가 팔았는데 무슨 상관이냐" 일언지하에 거절하자, 시조왕의 사폐지가 망실되는 억울함을 참을 수가 없어 해결책을 찾았으나, 요즘 같은 법원이나 호소한 기관이 없는지라, 부득이 이 사실을 당시 경주군 유림(儒林)에 알리니 향교의 전교(典敎)인 이훤구가 향회(鄕會)를 열어 공의판결로 보상금 중 일부지만 논 17두락을 변제하게 한바 있다. 1925(을축)년 동·서재를 중수하고, 1929(기사)년에는 전의 정문과 내신문을 수리하고, 1938(무인)년 관리실 5칸을 건축하고 우물도 준설 완비하였다.1955(을미)년에 당시 참봉인 봉희(鳳熙 : 경주군수 역임)가 교육청예산 70만원으로 상인재(象仁齋) 보수와 정문을 처음으로 세웠다.
숭신전을 건립하여 신위를 모시고 향제를 올린지 82년이 지나는 1979년 반월성 전체가 경주국립공원 정비계획에 포함되면서, 정부가 반월성(半月城) 위에 거주하던 민가는 물론 숭신전까지도 월성(月城)에서 철거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종중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숭신전 전체를 현재의 동천동의 석탈해왕릉 옆에 원형 그대로 이건하게 되었다.
오늘 현재 반월성에서 숭신전 대궐터로 남아서 전하는 흔적이라면, 숭신전 옛터의 대문격인 팔각돌기둥과 옛날부터 사용하던 연꽃조각 우물돌(井石) 그리고 숭신전이 있었던 자리(둔덕)만 잡초에 묻힌 채 남아 있을 뿐이다.
눈여겨 자세히 살펴 보아야 비로소 이곳이 원래의 숭신전 터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간단한 설명이 적힌 안내판이 2012년 생겨나 이곳이 숭신전 터이며, 신라시대 우물이라고 설명한다.
먼저 우물을 자세히 살펴 보면, 지표면의 우물 윗돌은 가로세로 모두 150cm가량 되는 네모난 형태로 각 변에 6개씩의 쌍엽 연꽃잎을 새긴 돌 두 개를 맞붙이고 그 위에 삼단에 걸쳐 기하학적 직선 구획이 되어 있는 정교한 것이다. 지표면에서 약 35cm가량 높이로 돌출되어 있고 물이 닿는 구연부 둥근 부분 안지름은 65cm 내외이며 깊이는 약 10m로서 안을 내려다 보면 까마득하게 고인 우물물이 보인다. 맨 윗부분 두레박줄 닿은 부분의 돌은 많이 훼손되어 떨어져 나가고 연꽃조각도 풍상을 머금고 닳아 내린 것이 오랜 기간 사용해온 우물 같았다. 경주에 남아 있는 모든 우물 중 대궐구역에서 보는 우물답게 화려한 조각이 있는 유일한 우물이었다.
필자는 1955년부터 계림중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이곳에 자주 들려 수업 준비와 교재를 만들면서 숭신전도 돌보고 했는데, 우물물이 어떻게 찬지 한여름에도 이 우물물로는 바로 등물을 할 수 없었다. 숭신전지에 의하면 1938년 820원의 비용으로 관리실 5칸을 짓고 우물을 준설·보수하였다는 기록이 한 줄 있는데 보수가 어떤 규모의 공사를 말하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다만 숭신전이 처음 세워질 때 우물이 먼저 있었을 것은 확실해 보인다. <계속>
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 kua348@naver.com
숭신전(崇信殿)은 대한제국 시절(광무 2년), 당시 경주군수 권상문이 석탈해왕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이조 조정에 제안하고, 본손 필복(必復)이 관계요로 및 사림(士林)의 협조를 받아 광무와이 하사한 땅인 반월성 언덕위에 전각(殿閣) 건물을 건립한 후 시조왕 신위를 봉안(奉安)하고 향사(享祀)를 드리게 되었다.
이어서 광무10(병오 서기1906)년에 숭신전호(崇信殿號) 현판을 사액(賜額) 받았다.
임금이 내린 현판(편액)은 사액(賜額)이라 하며 왕이 직접 쓰거나 당대 최고의 명필을 천거하여 쓰게 합니다. 또한 왕이 내린 사액 현판은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하며, 왕이 직접 쓴 글씨는 전서체로 어필(御筆)이라 글 옆에 작게 새겨집니다. 석탈해왕의 신위를 모시고 향제를 올리는 사당(祠堂)에는'숭신전(崇信殿)'이라는 이름으로 사액 되었습니다. (참고 : 朴씨는 숭덕전(崇德殿), 김씨는 숭혜전(崇惠殿)으로 사액 되었다.)
사액(賜額)은 임금이 사당(祠堂), 서원(書院), 누문(樓門) 등에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친히 내리던 것을 말합니다. 또한 역대 왕의 시조들을 모시는 사당에 '숭(崇)'자와 '전(殿)'자가 들어간 이름은 신하의 건의 아래 임금이 직접 내린 경우가 많습니다. 즉 아무나 '숭(崇)'자와 '전(殿)'자를 쓰지 못한다는 규례가 있다고 합니다.
서기1912(임자)년 석씨의 사폐지로 하사된 땅인 반월성 전구역이 토지조사 때 국유지로 편입되자 후손인 월남(月楠)과 문호(文浩)가 이의 회복을 위해 노력 중 돌아가시고 개간된 토지만은 당시 종중에 관여하던 'ㅂㅈ' 개인명의로 신고되었다, 그 후 1926년에 국책으로 공원시설에 수용되자 보상금 7,000원은 신고자 개인이 수령하였다, 이 내용을 알게된 본손 천대(千大:보명은 在麟)와 봉우(鳳佑:자는 규복)가 보상금으로 대토(代土)라도 하기 위해 보상금 수령자를 만났으나 "내 이름으로 된 땅을 내가 팔았는데 무슨 상관이냐" 일언지하에 거절하자, 시조왕의 사폐지가 망실되는 억울함을 참을 수가 없어 해결책을 찾았으나, 요즘 같은 법원이나 호소한 기관이 없는지라, 부득이 이 사실을 당시 경주군 유림(儒林)에 알리니 향교의 전교(典敎)인 이훤구가 향회(鄕會)를 열어 공의판결로 보상금 중 일부지만 논 17두락을 변제하게 한바 있다. 1925(을축)년 동·서재를 중수하고, 1929(기사)년에는 전의 정문과 내신문을 수리하고, 1938(무인)년 관리실 5칸을 건축하고 우물도 준설 완비하였다.1955(을미)년에 당시 참봉인 봉희(鳳熙 : 경주군수 역임)가 교육청예산 70만원으로 상인재(象仁齋) 보수와 정문을 처음으로 세웠다.
숭신전을 건립하여 신위를 모시고 향제를 올린지 82년이 지나는 1979년 반월성 전체가 경주국립공원 정비계획에 포함되면서, 정부가 반월성(半月城) 위에 거주하던 민가는 물론 숭신전까지도 월성(月城)에서 철거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종중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숭신전 전체를 현재의 동천동의 석탈해왕릉 옆에 원형 그대로 이건하게 되었다.
오늘 현재 반월성에서 숭신전 대궐터로 남아서 전하는 흔적이라면, 숭신전 옛터의 대문격인 팔각돌기둥과 옛날부터 사용하던 연꽃조각 우물돌(井石) 그리고 숭신전이 있었던 자리(둔덕)만 잡초에 묻힌 채 남아 있을 뿐이다.
눈여겨 자세히 살펴 보아야 비로소 이곳이 원래의 숭신전 터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간단한 설명이 적힌 안내판이 2012년 생겨나 이곳이 숭신전 터이며, 신라시대 우물이라고 설명한다.
먼저 우물을 자세히 살펴 보면, 지표면의 우물 윗돌은 가로세로 모두 150cm가량 되는 네모난 형태로 각 변에 6개씩의 쌍엽 연꽃잎을 새긴 돌 두 개를 맞붙이고 그 위에 삼단에 걸쳐 기하학적 직선 구획이 되어 있는 정교한 것이다. 지표면에서 약 35cm가량 높이로 돌출되어 있고 물이 닿는 구연부 둥근 부분 안지름은 65cm 내외이며 깊이는 약 10m로서 안을 내려다 보면 까마득하게 고인 우물물이 보인다. 맨 윗부분 두레박줄 닿은 부분의 돌은 많이 훼손되어 떨어져 나가고 연꽃조각도 풍상을 머금고 닳아 내린 것이 오랜 기간 사용해온 우물 같았다. 경주에 남아 있는 모든 우물 중 대궐구역에서 보는 우물답게 화려한 조각이 있는 유일한 우물이었다.
필자는 1955년부터 계림중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이곳에 자주 들려 수업 준비와 교재를 만들면서 숭신전도 돌보고 했는데, 우물물이 어떻게 찬지 한여름에도 이 우물물로는 바로 등물을 할 수 없었다. 숭신전지에 의하면 1938년 820원의 비용으로 관리실 5칸을 짓고 우물을 준설·보수하였다는 기록이 한 줄 있는데 보수가 어떤 규모의 공사를 말하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다만 숭신전이 처음 세워질 때 우물이 먼저 있었을 것은 확실해 보인다. <계속>
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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